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패트릭 유잉 (문단 편집) ==== 타당한가? ==== 이는 유잉의 활약으로 이길 수 있었던 경기는 완전히 배제하고, 유잉이 없이 이긴 경기에만 초점을 맞춘 지극히 보고싶은 것만 골라 보는 결과론이다. 일단 당시 1999년 플레이오프 경기를 보자. 위에서 언급된 대로 인디애나 페이서스는 상성상 빠르고 다이나믹한 스몰라인업엔 쥐약이었던 팀이었다. 실제로 당시 인디애나 페이서스를 상대로는 (말년이라 발이 늦어진) 유잉이 주전 라인업에서 빠지는게 더 유리하다. 하지만 다른 팀을 상대로는 전혀 그렇지 않다는게 문제. 스몰라인업의 센터였던 크리스 더들리나 [[커트 토마스]]가 '''[[샤킬 오닐]]과 매치업할 수 있겠는가?'''[* 더들리는 종종 매치업하긴 했고, '''박살이 났다.''' 심지어 오닐 하일라이트에 빠짐없이 나오는, 오닐이 더들리를 무자비하게 밀어붙히고 인유어페이스 덩크를 먹은 다음 대놓고 밀어서 넘어뜨리는 플레이를 당하기도 했다. 이후 열받은 더들리가 공을 오닐에게 던져 싸움이 날 뻔하기도...] 더 중요하게는 97년부터 4년 연속 혈투를 벌였던 마이애미 히트의 [[알론조 모닝]]과? 그리고 이처럼 센터가 강한 팀과 매치업했을 때 유잉이 없이는 애로사항이 꽃핀다. 유잉이 없었다면 당시 오닐을 제치고 올-NBA 퍼스트 팀에 올르는 등 기량이 절정에 달했던 모닝을 닉스가 넘는 건 절대 불가능했을 것이다.[* 스몰라인업의 가장 큰 약점이 포스트플레이가 위력적인 정통센터다. 이 때문에 [[르브론 제임스]], [[드웨인 웨이드]], [[크리스 보시]]가 이끌던 마이애미 히트가 잘하긴 하지만 슈퍼스타급은 아니었던 [[로이 히버트]]에게 골밑이 박살나며 고전했다. 참고로 히버트 역시 느린 정통센터였으며(젊었을 때 유잉은 결코 느리지 않았다), 센터를 더블팀하기 좀 더 용이해진 지역방어가 있었음에도 이 정도 위력이었다.] 그리고 이 동부를 평정하고 파이널까지 올라온 닉스가 [[샌안토니오 스퍼스]]에게 일방적으로 밀리며 패배하는 것도 유잉이 있었다면 상황이 달라졌을 것이다. 당시 인디애나는 골밑 공격력이 비교적 약한 점프슈팅팀이라[* 데일/앤토니오 데이비스 듀오는 수비와 리바운드 등 궂은 일에 특화된 빅맨들이었고, 릭 스미츠는 수준급 공격수였으나 골밑을 폭격하기보단 점프슛으로 득점지원을 하는 선수였다.] 사실상 센터없이도 상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상성의 중요한 예로, 07시즌 당시 MVP [[디르크 노비츠키]]가 이끌던 67승의 [[댈러스 매버릭스]]는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에게 1라운드에 패배했는데, 그렇다면 매버릭스는 정규 시즌용 팀일까? 전혀 아니다.[* 댈러스 입장에선 환장할 만한 것이, 06시즌 팀 사상 역대최고승과 파이널에서 첫 두 경기를 이기고도 역전패했던 매버릭스는 그야말로 칼을 갈고 다음 시즌을 준비했고, 06-07시즌 전성기를 달리는 노비츠키를 필두로 절정의 위력을 보이며 상대한 29개팀 중 '''28개팀을 상대로 전적에서 우위였다.''' 그러나 단 한 팀, 04-05시즌 중반부까지 매버릭스를 이끌어 이들의 장단점과 이들의 감독 에어버리 존슨(당시 코치)의 스타일까지 속속들이 알고 있던 돈 넬슨 감독이 이끄는 워리어스에게는 3전 전패를 당했다. 리그 모든 팀들을 상대로 해볼 만했지만, 호구잡혔던 단 한 팀과 맞붙은 것. 사실 1라운드가 시작되기 전까지는 아무리 상대전적에서 앞서도 댈러스가 워낙 정규 시즌에서 압도적이었던지라 "고전하겠지만 그래도 댈러스인데..."하는 시각이 많았고 업셋을 점치는 이는 소수였다. 결과는 2006-07시즌 1라운드 사상 최다 승수(-25승) 업셋이라는 굴욕으로 이어진다.][* 이는 2017-18시즌 [[토론토 랩터스]]에게도 해당된다. 당시 창단 최고 성적(59승 23패)으로 동부 컨퍼런스 1위까지 차지했을 정도로 대부분 팀들에게 강했지만, 단 한 팀, [[르브론 제임스]]가 버티는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에게는 단 한 번도 우위를 보이지 못했다. 그리고 결과는 2라운드에서 39년만에 1번 시드의 4전 전패 스윕패로 이어지는 굴욕으로 이어졌다.] 무엇보다 이 이론은 당시 경기에 참여했던 당사자들에게조차 빈축을 샀다. 당시 닉스 감독 제프 밴건디는 유잉 무용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대꾸할 가치도 없다는 듯 '멍청이들(fools)' 이라는 한 마디로 종결을 지었으며, 트윈 테러의 한 축이었던 [[라트렐 스프리웰]] 또한 '유잉 없이 이긴 경기만 보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실제로 유잉 없이 게임을 뛰는 것은 유잉과 함께 뛰는 경기보다 몇 배는 힘이 든다'고 점잖게 일침을 놓았을 정도. 실제로 99년 히트와의 플레이오프 최종전에서 [[앨런 휴스턴]]의 0.4초 버저비터로 극적인 업셋을 달성한 경기에서는 모닝을 압도했던 유잉의 활약이 없었다면 그런 클러치 상황을 만들 수조차도 없었을 것이다. 해당 경기는 22득점 11리바운드의 유잉이 21득점 5리바운드에 그친 모닝을 압도했지만 시리즈 전체를 놓고 보면 압도까진 아니었다. 당시 말년이라 하락세가 뚜렷하던 유잉과 달리 8살이나 아래인 모닝은 만 29세로 전성기를 달리고 있었다. 게다가 시리즈 평균 스탯으로 보면 모닝은 21.6점 8.2리바운드, 유잉은 14.6점 10.8리바운드로 오히려 모닝이 앞섰다. 그러나 상성상 모닝은 유잉을 상대하기 힘들어했는데, 중거리슛이 있다고 하나 어디까지나 골밑에서 득점하는 정통센터였던 모닝 입장에선 키도 크고 팔도 긴 유잉이 여전히 부담스러운 상대였다. 실제로 젊고 더 에너지가 넘치는 모닝이 정규 시즌보다 리바운드가 떨어지고, 늙은 유잉은 오히려 리바운드 수치가 올라간 걸 봐도 알수 있다. 게다가 유잉은 모닝보다 평균 4분(38분 vs 34분) 적게 뛰었기 때문에 그렇게까지 큰 차이도 아니다. 또한 유잉 vs 모닝만 그런게 아니라 이때 닉스에는 [[마커스 캠비]], 크리스 더들리같이 모닝보다 키크고 높이도 높은데다 수비력이 준수한 백업센터들이 돌아가면서 골밑을 채웠고, 이들을 보좌하는 살림꾼 파워포워드 자리에는 [[래리 존슨]], 커트 토마스 같은 터프가이들이 부지런히 움직이며 활동범위가 좁았던 유잉을 보좌했다. PJ 브라운이라는 유능한 파워포워드가 있었지만 히트는 골밑은 모닝에게 맡기고 [[팀 하더웨이]], [[자말 매쉬번]], 댄 멀리같은 가드, 스몰포워드쪽이 강했고 팀 전체적으로 단신팀이었던 히트는 닉스의 골밑 높이에 모닝이 고전한 약점이 찔리면서 밀리기 시작했다. 또한 이듬해 히트와의 플레이오프 시리즈에서는 2승 3패로 뒤진 일리미네이션에서 두 경기동안 35득점 28리바운드를 쓸어담으며 팀을 위기에서 구해냈으며, 결정적으로 유잉이 떠난 후 [[글렌 라이스]]를 데려와 트리플 테러를 구축했던 2001년에 정규 시즌 성적의 하락은 물론, 플레이오프에서도 근 13년만에 1라운드에서 탈락하는 수모를 맛보며 기나긴 닉스 암흑기의 서막을 알렸다. 애초에 이렇게 눈 앞의 승패 기록만 보고 판단하는 건 변화무쌍하며 온갖 변수가 있는 농구란 스포츠의 특성을 잘 모르고 하는 말이다. 농구가 비록 [[야구]]나 [[축구]]보다 변수가 적다고 하나 96시즌에 72승으로 최다승 기록을 거둔 챔피언 팀 불스가 꼴찌팀 랩터스에게 덜미를 잡히는 등 같은 팀의 전력이라도 컨디션이나 상성 등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즉, 이 시리즈에서 이긴 경기나 진 경기가 모두 동일한 조건(양 팀 선수들의 컨디션, 전술 등)에서 벌어지고 딱 유잉의 존재 유무만 차이가 난 게 아닌 이상 이걸 갖고 "유잉이 없으니 이겼네?"라고 하는 건 1차원적 발상이다. 같은 선수라도 컨디션에 따라 10점 넣고, 40점 넣는 등 차이가 날 수 있기 때문. 즉, 유잉 무용론은 겉으로 드러난 승-패 기록, 스탯만 보기 때문에 실제 경기 내용은 반영하지 않는다. 유잉은 당시까지만 해도 포스트업에서 위력적인 선수였고, 그가 골밑에 있기만 해도 수비가 몰려 스프리웰 같은 돌파위주 선수들에게 숨통이 트인다. 또한 집중수비를 받는 주득점원이 해주는 득점은 아무 수비 없이 받아먹기로 하는 득점과 차원이 다르다. 그리고 전성기급 수비력은 아니었지만 7피트 신장에 훌륭한 수비센스를 갖고 있는 유잉이 골밑에서 버티고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은 차이가 크다. 추가로 이 유잉 무용론을 커리어 전체로 확장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더더욱 생억지다. 인디애나와 상성 문제가 불거진 유잉은 만 37세로 느려질대로 느려진 선수였다. 이 때의 유잉이라면 상대에 따라 기용을 제한하는 게 말이 될 수 있지만 전성기 때 유잉은 기동력 문제가 있지도 않았다. 또한 그가 전성기가 지나고 30대 중반에 접어들면서 기동력이 저하된 이후에도 아주 말년(만 36~37세 부근) 전까진 기동력 저하가 그리 큰 문제도 아니었다. 워낙 하프코트에서 위력이 강했기에... 당장 만 35세에 가깝던 97시즌에 올-NBA 세컨드 팀에 들엇던게 유잉이었다. 샤킬 오닐이 유잉에 밀려 이 시즌 서드 팀에 그쳤을 정도. 그런데 그 오닐만 하더라도 발이 심하게 느려진 2000년대 중반까지 최정상급 선수로 위용을 보였다. 아무리 발이 늦어서 속공시 애로사항이 생긴다고 해도, 하프코트에서 상대방을 박살내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정리하자면 유잉 무용론은 '''말년의''' 유잉이 '''일부 팀들'''을 상대로 상성에서 밀려 안 좋은 모습을 보인 것이지, 진짜 유잉이 없어야 팀이 잘 돌아가는 게 아니다. 또한 위의 유잉 무용론의 예시로 된 선수들의 케이스가 모두 타당한 것도 아니다(농구선수 항목이므로 여기선 농구선수들만 언급한다). 대표적으로 베일러의 경우, "그가 72시즌 초반에 은퇴하자 레이커스는 33연승을 거두고 우승을 차지했다"면서 그를 과대평가받은 선수 취급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당시 베일러는 '''은퇴를 앞두고 있어 실력이 떨어질 때로 떨어진 선수였다'''. 베일러가 슈퍼스타급 실력을 발휘한 건 사실상 70시즌이 마지막이었다(24점 10.4리바운드). 그 다음 시즌에 그는 부상으로 2경기에서 10점 5.5리바운드에 그쳤으며, 72시즌엔 9경기 11.8점 6.3리바운드에 그쳤다. 즉, 유잉 무용론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베일러가 화려한 스탯에도 불구하고 실제론 팀에 도움이 되지 않아서 그가 은퇴했음에도 팀이 우승했다"가 아니라, "은퇴를 앞두고 실력이 떨어진 상태였기 때문에 팀에 도움이 못 됐었다"가 맞는 것이다. 위대한 선수들이 은퇴를 앞두고 전성기에 한참 못 미치는 기량으로 플레이하는 것은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오히려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이며, 스스로 현실을 인정하고 작아진 롤을 감수하며 팀에 헌신하는 모습이야말로 베테랑의 품격으로 칭송받기도 한다. 유잉 또한 닉스에서의 말년 시절엔 1, 2옵션을 앨런 휴스턴과 라트렐 스프리웰에게 양보하면서 공격에서의 롤을 대폭 줄이고 수비라인의 핵으로 활약했기 때문에, 스탯상으로는 경기당 평균 15.0득점 9.7리바운드로 크게 눈에 띄는 성적은 아니었다. 그런데 이 말년의 모습을 두고 과대해석하며 "봐라. 명성에 비해 실제 공헌도는 형편없네"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이다. 유잉 무용론의 가장 큰 문제가 이것이다. 해당 슈퍼스타가 잘해서 팀이 잘했을 때, 또한 그 선수가 빠져서 팀이 힘들었을 때는 안 보고, '''이 이론에 맞는 일부 케이스만 보고 전체인양 부각시킨다는 것.''' 유잉의 경우, 그가 빠져서 잘 나갔을 때는 말년에, 그것도 일부 경기에서밖에 없다. 베일러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이걸 갖고 전체인양 확장하는 것은 헛소리에 불과하다. [[https://nbamania.com/g2/bbs/board.php?bo_table=maniazine&wr_id=164859&sca=&sfl=wr_subject&stx=%EC%9C%A0%EC%9E%89&sop=and&scrap_mode=&gi_mode=&gi_team_home=&gi_team_away=|유잉의 리더십과 그의 가치에 대한 본 한 국내팬의 글]]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